특집 다큐: 한국을 사랑한 호주 매 씨 가족을 아십니까?

Helen (third from left) and Catherine (second from left) Mackenzie at the opening of Ilsin Woman's Hospital in 1952

일신부인병원 창립 당시 매혜란(왼쪽에서 세 번째)과 매혜영(왼쪽에서 두 번째)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한 평생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일일까?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사실은 많은 것들을 가졌다는 이들… 아버지, 어머니에 이어 딸들까지…70여 년 동안 한국의 병든 자들을 돌본 호주 매켄지 가족의 삶을 들여다본다.


시드니의 시내에 위치한 호주 한국 문화원에서는 1910년에서 1970년대까지 한국의 지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호주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전시인데요.

2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호주 매켄지 가족의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Highlights

  • 시드니한국문화원, 4월 8일-7월 8일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전시회 실시
  • 1910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부산나병원을 운영한 아버지 매견시(제임스 맥켄지)
  • 나환자 자녀들과 나병 완치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 운영한 어머니 매부인 (메리 켈리)
  •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해 의사와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본 딸 매혜란(헬렌)과 매혜영(캐서린) 매켄지
매켄지 가족은 호주 매 씨를 본으로 각자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1910년 호주 장로교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아버지 제임스 매켄지는 매견시, 어머니 메리 켈리는 매부인으로 이들은 한국 나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이들의 딸 헬렌은 한국명 매혜란.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조산사이자 산부인과 간호사였던 여동생 캐서린, 한국명 매혜영과 함께 한국전이 한창이던 당시 부산에 첫 부인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두 자매는 1978년 은퇴할 때까지…

이곳에서30여 년간 한국의 산모와 아이들을 치료해 왔습니다.  

‘호주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매 씨 가족의 대를 잇는 한국에서의 의료 활동은 가족이 남긴 사진을 통해 전시회에서 보여졌습니다.
이번 전시는 사실 한국과 호주의 수교 60주년을 맞아 작년에 개막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정상적인 전시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전시는 결국 올해 4월로 연기됐습니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주호주한국문화원 김지희 원장의 설명입니다.

[김지희/문화원장]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 근현대기까지 이르기까지 한 양국의 외교 역사보다도 오래된 호주 매씨 가족 그리고 한국의 아름다운 인연을 소개해서 호주 현지의 양국의 민간 교류의 역사도 알리고 수교 60주년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 이번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전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입니다.

2005년 90세에 사망한 차녀 매혜영.

이어 2009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 장녀 매혜란을 끝으로 한국을 위해 일한 매 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별세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호주 매 씨 가족의 이야기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에야 널리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매 씨 자매들은 생전에 언론 인터뷰도 대부분 거절한 채 묵묵히 자신의 삶만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자매가 남긴 1만 여장에 달하는 사진들이 지난 2016년 경기대학교 소성 박물관의 전시로 공개되며…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처음부터 이끌어 온 경기대학교 소성 박물관의 학예 팀장인 배대호 학예사는 2012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매 씨 가족의 사진을 접하게 됐다고 SBS 한국어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배대호/학예사] 이 매혜란과 매혜영의 제자 되시는 분이 김영옥 선생님이라고 지금 멜번에 거주하고 계세요. 그래서 이제 이분이 그 근처에 사시다가 매혜란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 사진을 그분들이 세우신 일신기독병원으로 보내셨어요. 근데 저는 평소에 좀 김영옥 선생님하고 인연이 좀 있어서 제가 박물관에 있으니까 저한테 좀 가서 이 사진들을 좀 봐달라 그래서 제가 직접 가서 한번 보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막상 보니까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진들이 그 안에 있어서 제가 이제 2012년부터 디지털화를 하면서 연구를 시작을 했고요. 2016년도에 이제 첫 번째 전시를 개최를 했습니다.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s curatorial team leader Mr Bae Daeho
경기 대학교 소성 박물관 배대호 학예사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배대호 학예사에게 이 사진을 소개한 인물은 멜번의 한인 동포 김영옥 씨.

매 자매가 세운 병원에서 매혜영에게 조산사가 되는 교육을 받은 제자로, 호주에 살고 있는 매 자매의 유일한 제자입니다.

김영옥 씨는 매 자매가 세상을 뜬 뒤, 멜버른 자택에 남겨진 사진과 남은 유품 모두를 정리해 매 자매가 설립한 한국 일신 부인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경기대 소성 박물관에 매 씨 가족의 유품에 대해 제보했고 이를 통해 70여 년에 이르는 매 씨 가족과 한국의 깊은 인연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겁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매 씨 가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도록 하죠.

아버지 매견시(제임스 맥켄지) 1856년 ~1956년

[매견시] 나는 귀족과 같은 환영을 받았다. 내 눈으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100명의 한국인이 특유의 복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길 양쪽에 줄지어 있었다. 그들은 나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팔을 밑으로 내리더니 두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뿐 만 아니라 몸 전체를 구부려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어르신, 평안히 여행하셨는지요?”라고 물었다.

1910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당시를 기록한 매견시의 글입니다.
A wedding photo of James Mackenzie and his wife Mary Kelly
매견시와 매부인의 결혼 사진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당시 매견시의 임무는 한국 최초의 나환자 요양 시설인 ‘부산나병원’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한센병이라고도 불리는 나병은 만성 감염성 질환입니다.

1900년대 당시… 한국에는 약 2만여 명의 나환자가 있었다고 기록되는데요.

나균이 몸에 들어가면 몸속에 있는 모든 신경이나 감각을 없애버립니다.

배대호 학예사의 설명입니다. 

[배대호 학예사] 그래서 몸에 상처가 나면 보통의 경우는 빨리 치료를 하면 없어지겠지만 그게 자꾸 남아 있으니까 외형적으로 굉장히 많이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나환자들의 병을 우리가 천형이라고 불렀거든요. 하늘에서 내린 병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보기가 흉측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던 병이 바로 이 한센병 또는 나병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족들도 같이 있기를 거부하는 거죠. 그래서 둘 중에 하나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거주를 하면서 숨기거나 아니면 집에서 쫓아내 버리는 거죠.

부산나병원은1909년 한국 최초로 세워진 나환자들에 대한 근대적인 치료 기관이었습니다.

매견시는 1912년부터 이곳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게 시작했습니다.
The Busan Leper Hospital
부산나병원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매견시의 관리 첫해… 부산나병원에는 54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기록되며 이들의 사망률은 25%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 부산나병원은 병동 40여 개에 680명의 환자를 수용하는 대형 병원으로 성장해 나갔고, 환자들의 사망률도 2%까지 떨어졌습니다.

매견시는 완치 이후에도 몸의 남은 상처와 차별을 우려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환자들을 위해 병원 근처에 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었으며 무려 1500여 명이 그곳에 거주했다고 기록됩니다.

1938년 은퇴할 때까지… 매견시는 29년간 나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멜버른에 자리 잡은 매견시의 묘비에는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 매부인(매리 켈리) 1880년~1964년

역시 호주 장로회 선교사였던 어머니 메리 켈리는 사실 남편 매견시보다 5년 앞서 한국에 파송됐습니다.

[매부인]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나를 한가운데 앉혀 놓고 내 얼굴, 나이, 옷에 대해 추측하고 수군거렸다. 치마를 뒤집어 보려고 해서 그것을 잡고 있으면, 다른 이들은 신발을 만지고 미리핀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말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일어났다”

1905년 한국에 도착한 당시를 적은 매부인의 기록입니다.

매부인은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초석이 된 양반, 백정 동석 예배를 이끌어 낸 여성 선교사로 평가받습니다.

1912년 매견시와 결혼한 뒤 진주에서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매부인은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을 개원합니다.

이곳은 나환자들의 자녀와 나병에서 완치된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매부인은 안식년에 호주로 돌아가 기금을 모아 이를 개원했습니다.
The House for Healthy Children,an orphanage for children left behind by leprosy
매부인이 운영한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아이들은 매부인을 어머니라 부르며 잘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매부인은 첫째 헬렌, 매혜란과 둘째 캐서린 매혜영을 포함 한국에서 출산한 자신의 다섯 아이들도 모두 나환자 자녀들과 함께 어울려 키웠습니다.

매혜란(헬렌 매켄지) 1913년 ~ 2009년 / 매혜영(캐서린 매켄지)1915년 ~ 2005년

한국에서 태어난 매혜란과 매혜영은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유창하게 쓰곤 했습니다.

생전 매혜란과 매혜영이 남긴 영상이 전시에 재생돼 그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매혜란, 매혜영] 저는 매혜란인데 일신 기독 병원 첫째 원장 했어요. 저는 원장님의 동생인데 간호원입니다. 처음부터 같이 일했습니다. 우리 둘은 부산에서 난 사람입니다. 부모들은 선교사로 오랫동안 한국에 계셨습니다. 부산 사람인데 우리 말은 부산 말입니다.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한 매혜란은 호주로 돌아가 멜버른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됩니다.

언니를 따라 호주에 들어간 매혜영은 왕립 어린이 병원 간호 학교를 졸업한 뒤 간호사와 조산사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환자과 함께 한 부모님을 보고 자란 매 자매…

부모님이 의료인이었다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기에 둘 다 망설임 없이 의료인의 길을 택합니다.
James, Helen and Catherine Mackenzie and Mary Kelly
매견시, 매혜란, 매혜영 그리고 매부인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아버지 매견시와 어머니 매부인은 1938년 은퇴를 하고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호주에 있던 매 자매는 1940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그러나 매 자매의 입국은 식민지 일본 정부에 의해 매번 거절됐고, 결국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13일에야 드디어 다시 자신이 태어난 곳 한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됩니다.

매 자매는 산모와 아픈 아기들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UN과 한국 정부의 자문에 따라 같은 해 9월 17일, 일신 여성 병원을 개원합니다.

처음 병원은 아주 소박했습니다.

자매들은 어릴 때 다닌 유치원 강당을 빌려 20개의 병상을 놓는 것으로 병원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년 후 일신 부인 병원은 매년 6000명의 신생아들을 받아내는 대형 병원으로 성장합니다.

[배대호/학예사] 최초에는 이 병원이 직원이 4명이었는데 20년이 지나고 나니까 직원이 231명이 돼 있었어요. 그리고 원장 재직 시절에 수술을 한 횟수가 2만 4702회, 하루에 3.4회. 초진 환자가 21만 7772명 하루에 30명. 그러니까 이분이 한 수술은 사실은 분만이 아니고 일반적인 산부인과 수술을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제 이거를 나중에 병원에서 들어보니까 지금 이제 현 원장님한테 들어보니까 이때 당시에는 가스를 가지고 환자를 마취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때 가스로 마취를 하면 그 수술방에 있었던 분들이 대부분 다 아주 약한 마취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3.3회 수술을 하셨던 셈입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으로 매 자매가 은퇴할 때까지 일신 부인 병원에서는 2만 4702건의 수술이 실시됐고, 72,302명의 아기들이 태어났습니다.

대략 하루에 7명의 아이들이 병원에서 출산된 셈입니다.

하지만 일신 부인 병원의 놀라운 점은 이런 빠른 성장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개원할 때부터 병원비가 있든 없든 아픈 사람은 누구든 환자로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매혜란의 육성입니다.
Helen Mackenzie was looking after a mother who delivered the 10,000th baby in Ilsin Women's Hospital.
일신부인병원에서 태어난 1만 번째 아기를 출산한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매혜란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그 결과 1950년대에는 전체 환자의 50% , 60년대에는 60%,  70년대에는 29%가 무료 진료를 받았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남녀 차별이 만연했던 당시의 한국에서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과 공평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매 자매는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배대호/학예사] 이번 전시대 가서 보시면 그중에 사진이 나와 있을 텐데 쌍둥이들이 나와 있는 사진이 꽤 많아요. 그 사진이 뭐냐 하면 잘 아시겠지만 한국은 남성 여성차별이 좀 많이 존재했었잖아요. 그래서 쌍둥이를 놓으면 딸아이한테 먹을 걸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매 원장님께서 남녀 쌍둥이는 반드시 같이 데리고 와야 치료를 해주고 먹을 걸 나누어 줬는데 이게 쌍둥이 파티라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매 자매는 부모님이 퇴원한 나환자들의 생계까지 세심히 돌봤던 것처럼 미혼모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병원 내 일자리를 제공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은퇴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호주의 선교사였던 바바라 마틴 박사는 한국에서 15년간 매 자매와 일했습니다.

1963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32년간 일신 부인 병원에서 근무한 88세의 마틴 박사는 매 자매가 한국 의료계에 남긴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여성 산부인과 전문의들과 조산사 그리고 산부인과 전문 간호사들을 양성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바라 마틴] 저희는 여성들만을 교육시켰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죠. 첫째는 여성들은 의대를 졸업하고 난 뒤 수련을 할 곳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둘째는 남성들이 여성 밑에서 수련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죠. 그래서 여성들만 교육을 시켰던 겁니다.  당시는 여성들에게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나면 수련을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Dr Barbara Martin(centre) with midwifery graduates in Ilsin Women's hospital in 1981
1981년 일신부인병원을 졸업한 조산사들과 바바라 마틴 박사(중간) Source: Dr Barbara Martin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바뀌며 조산사들은 또한 고작 3개월의 교육을 받고 현장에 파견되곤 했습니다.

많은 조산사들은 실제로 아이를 출산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됐고, 일신 부인 병원은 이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해 경험 있는 조산사와 간호사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은퇴할 때까지 매혜란은 총 12명의 산부인과 전문의를 교육했고, 이 숫자는 2014년 149명으로 까지 늘어났습니다.

조산사였던 매혜영은 1978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1036명의 조산사를 교육해 다시 한국 전역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매혜영이 한국을 떠나 던 날 매혜영이 만든 한국 최초의 조산학 교본이 출간됐습니다.

매 자매의 일신 부인 병원은 실로 수 많은 산모와 신생아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Catherine Mackenzie(far right) and midwife trainees in Ilsin Woman's Hospital
매혜영(오른쪽)과 일신부인병원 조산사 교육생들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은퇴를 앞둔 매혜란과 매혜영은 추후 자신들이 떠난 뒤 병원이 계속해서 무료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해 1974년 안식년을 갖고 호주로 들어와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입니다.

전국 교회를 돌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한국의 환자를 도와 달라고 호소했고,17만 달러의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현재의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27만 달러가량입니다.

이는 고스란히 일신 부인 병원에 기부돼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1976년 매혜란은 병원 원장직을 포함 모든 것을 한국인 의사에게 넘기고 은퇴 후 호주로 돌아옵니다.

매혜영은 2년 뒤인 1978년 언니의 행보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매 자매는 20여 년간의 의료 활동에 대해 병원에서 단 한 번의 임금을 지급받지 않았습니다.

매 자매는 한국에 갈 때 가져갔던 여행 가방 하나 만을 그대로 들고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을 떠나며 매혜란이 남긴 말입니다.

[매혜란] 우리가 치료한 여성들이 아기도 잘 낳고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감사드려요. 다른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은퇴 후 성자와 같은 삶을 산 매 자매

은퇴한 간호사이자 조산사인 74세 한인 동포 김영옥 씨는 스승인 매 자매가 호주로 돌아온 뒤 33년간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던 매 자매.

호주인 남편을 만나 멜버른에 정착한 김영옥 씨는 한국에 있는 제자들을 대신해 스승들을 가까이서 잘 모시려고 노력했습니다.

은퇴 후 매 자매는 실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고 김영옥 씨는 말합니다.

[김영옥/ 매 자매 제자]  제가 선생님 집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아마 여러분도 상상을 못할 거예요. 그 아버지가 남겨준 집. 거기에는 조그만 거실에 부어 군 두 사람도 거기다 들어가서 가장 작은 부엌,  화장실과 샤워와 세탁기가 함께 있는 조그만 곳. 그런 곳에 사시고 차도 없고 또 호주 국가에서 주는 연금을 받고 아주 사실은 그거 보고 제가 기막혔었어요. 아니 한국에서 병원장 간호부장으로 그렇게 사신 분들이 그 생활은 나한테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Front:Catherine, Sheila(the youngest sister) and Helen Mackenzie/Back: Kim Young Ok and her husband Robert Dowling
뒷 줄:김영옥 선생과 남편 로버트 도울링 씨 앞 줄: 매혜영, 쉴라(매켄지 자매의 막내 여동생), 매혜란 Source: 김영옥
매 자매는 한국에서 성공한 의사와 간호사가 된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종종 제자들이 보내는 용돈 또한 필요한 곳을 찾아 기부해 버렸습니다.

스승들이 거세게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1993년과 1995년 각각 호주를 찾아와 스승들의 팔순 잔치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모두가 다 들어가서 앉기도 힘들었던 매 자매의 작은 집에서… 스승과 제자들은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습니다.

김영옥 씨는 매 자매가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김영옥/ 매 자매 제자]  저는 33년 동안 성자 옆에서 살았습니다. 그 선생님들 생은 무소유였어요. 자기 거 있는 거는 다 그냥 주는 그런 성격. 하다못해 돈이 들어와도 그거는 다시 또 교회에 바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쓰거나 그 무소유 삶을 선생님들이 선택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언제나 평온했었고 우리가 보기에는 가진 것은 없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사신 분 같아요.

끝나지 않은 호주 매 씨의 한국 소풍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배대호 학예사는 비록 매 씨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의 한국 소풍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매 씨 가족이 모두 호주로 떠난 1946년도에 찍힌 한 장의 사진에서 이 이야기는 포착됐다고 하는데요.

어머니 매부인이 운영한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 앞에 양복을 잘 차려입은 장년의 남성들과 그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 같이 서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A photo of many well-dressed Korean people standing up in front of an orphanage building run by Mary Kelly
A photo of many well-dressed Korean people standing up in front of an orphanage building run by Mary Kelly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학예팀은 연구를 통해 이 남성들이 모두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에서 자란 인물들로 모두 뛰어난 현대식 교육을 받고 성장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건축가와 사업가 등으로 자리 잡은 이들은…

매 자매가 긴 기다림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매 자매의 병원 설립과 의료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전쟁 중인 한국에서 외국에서 온 두 여인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병원을 설립해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오래된 인연의 도움과 지원 때문이었습니다.

[배대호/ 학예사] 아버지 어머니가 나환자들을 돌보고 그 나환자들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한국에 돌아온 매 자매를 도왔던 거죠. 그리고 다시 또 그 매 자매는 50% 60%에 이르는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줬죠. 그래서 저희가 이 소풍이 결코 끝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은 소풍이라는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매 자매의 정신이 담긴 일신 부인 병원은 이후 일신 기독 병원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70년 이상 부산의 대표적인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난 2021년까지 이 병원에서는 무려 29만 5천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습니다.

매 자매와 가족이 남긴 사진은 단순한 가족 사진이 아닙니다.

하얀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사람들, 아기를 포대기에 업거나, 머리에 큰 물건을 이고 가는 여성들, 초가집과 시장, 항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인의 일상과 변해온 한국의 자연 환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Mackenzie family
매혜란이 찍은 한국 사진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한국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절대 찍지 않았을…

우리네 평범한 일상이 1만여 장의 사진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매 자매의 제자 김영옥 씨는 매 자매가 죽기 전까지 한국을 깊이 사랑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혜란과 매혜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김영옥/ 매 자매 제자]  또 매 원장님이 꼭 그 선물을 주실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하루는 ‘얘 야 너네 정원에 정말 한국 무궁화 꽃이 있어야 되지?’ 이러면서 무궁화 꽃을 주시는데 한 겹짜리 ‘이것은 정말 한국 무궁화 꽃이야’ 그래서 지금도 우리 정원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한국 뉴스가 나오면은 신문에 그거를 다 오려갖고 저한테 갈 때마다 다 주시면서 한국 얘기를 하시고 언제든지 한국을 사랑하시고 그러니까 이분들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호주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한국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시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대를 이어 헌신한 호주 매 씨 가족,

이들이 조건 없이 한국에 심은 사랑의 씨앗이 오늘도 어딘 가에서 열매를 맺고 또 다른 씨앗을 심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은 오늘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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